국내여행/강원도

무궁화 로 대표되는 독립운동가 한서 남궁억선생 기념관

cowboy 2010. 4. 22. 10:00

한서 남궁억 기념관 

강원도 홍천은 스스로 ‘무궁화 고장’이라 할 만큼 무궁화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지역이다.

무궁화 동산을 건립하고 각종 문화재를 통해 무궁화정신 보급에 앞장서고 있다.

그 애정은 모두 남궁억 선생에게서 나온 것이다.

 

경기도에서 홍천으로 진입하는 초입새에 위치한 한서교회는 무궁화를 이 땅 민중의 가슴에 심어준 남궁억 선생의

 정신이 집대성된 곳이다. 남궁억 기념관과 복원된 옛 교회당, 넓은 무궁화 묘목장, 그리고 1998년 7월에 신축된

 기념교회 건물이 나란히 들어서있는 한서교회는 그 자체로 한국교회 민족운동의 교육관이라 할 수 있다. 

 

한서 남궁억 기념관에는 무궁화 십자가당 사건 취조 장면 재현, 보리울 모곡학교 모형, 남궁억 선생의 붓글씨와

저서, 독립신문 영인본, 황성신문 영인본 등이 전시돼 있으며 그가 작사한 노래 중 10여곡을 청취할 수 있는

코너가 마련돼 있다.

 

 

기념관은 독립운동가, 근대교육가로서 남궁억 선생의 발자취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도록 잘 꾸며졌다. 정치

 언론가로 일하다 배화여고에서 민족교육에 힘을 쏟던 남궁 선생은 일제의 핍박이 심해지자 56세가 되던 1918년

 강원도 홍천 모곡리에 내려왔다. 첩첩산중 오지였던 모곡리에 남궁 선생은 교회와 초등학교를 짓고 민족교육에 심

혈을 기울인다. 무엇보다 남궁 선생은 민족정신 함양을 위해 무궁화 묘목 수십만 그루를 심고 가꾸어 전국으로 보급

에 앞장섰다.

  1933년 남궁 선생이 지은 <무궁화 동산>이란 노래가 학생들 사이에 불려지게 되자, 일제는 보안법 혐의로

체포한다. 1936년 옥중에서 병들어 보석으로 석방된 74세의 남궁 선생은 결국 1939년 소천하였다.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과수나무 밑에 심어 거름이 되게 하라”라고 남궁 선생은 유언했지만 후손들은 그가 늘 새

기도 하던 유리봉에무덤을 만들었다.

 

 

 기념관엔 이 모든 행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특별히 일제의 심문과정을 재현한

인형전시실은 육성은 물론 탁자를 치는 효과음까지 나와 긴장감을 더해준다.

 

 

이곳의 해설사 역할을 맡아서 상세히 설명을 해주시는 현재 이곳 모곡예배당 목사님이시다.

 

 

 

 

 

 

 

기념관 옆으로 말끔히 복원된 옛 모곡교회당 건물이 있다. 한서교회의 옛 이름인 모곡교회당에는 마찬가지로

남궁 선생의 정신이 표현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데, 가운데 흰 천을 중심으로 남녀가 따로 앉아 예배를 드리던

모습이 인형으로 재현되어 있다. 한서교회 건물 앞에는 신축 당시 없었던 종탑이 높게 서있다. 남궁 선생의 정신

을 받들었던 어느 교인의 신앙유산을 기린 유자녀들이 지난 2000년 기증한 것이다. 한서교회 담임인 현재호 목

사 역시 남궁 선생의 제자였던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이곳에 찾아왔다.

 한서 남궁억(1863~1939년)선생은 고종황제 영어통역관, 황성신문 주필, 독립협회 활동 등 일제시대에

많은 정치, 교육활동을 했다. 남궁억은 대표적인 개화파의 한사람으로 정치보다도 교육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민영환이 세운 흥화학교에 강사로 나가 학생들에게 개화사상과 애국정신을 가르쳤다.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개혁운동에도 참여하였으나 독립협회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남궁억은 언론계에

하게 된다. 독립신문을 편집한 경험을 살려서 황성신문 사장으로 취임한 남궁억은 1902년 일본이 러시아

한반도 분할안을 토의하는 것을 폭로하여 일제의 침략야욕을 백일하에 폭로하였다. 그 때문에 심한 고문을

 받아 병약한 몸이 되었고 황성신문 사장직을 사임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남궁억은 무엇보다도 자기 분수에 맞게 각자 할 일에 충실하는 것만이 살길이라

고 믿고 여성교육의 일선에 나서 무궁화를 통한 애국심의 함양과 여권의 신장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그는 교단을 떠나야했고 고향에 내려온 남궁억은 먼저 모곡리 고향 마을에 교회를 짓고 주일학교를 시

작하였다.

 

남궁억 교장은 학교 뒤뜰에 무궁화 밭을 일구어 7만이나 되는 많은 무궁화 묘목을 길러서 몰래 나누어주기 시작

하였다. 그는 또 무궁화 노래를 지어 널리 퍼뜨려 민족정신을 일깨웠다. 나라꽃 무궁화처럼 독립운동을 하는데

무난한 상징물은 달리 없었다. 남궁억은 무궁화만이 아니라 국어와 국사교육을 통해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남궁 선생은 찬송가 371장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을 비롯한 여러 가지 노래와 역사책 <동사략>을 비롯한 여러

가지 책을 저술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남궁 선생의 지치지 않는 민족혼은 1922년 9월 마태복음 9장 35∼38절을 묵상하고 드린 기도문에서도 잘 나타

나있다. “주여, 이 나이 환갑이 넘은 기물이오나 이 민족을 위해 바치오니! 젊어서 가진 애국심을 아무리 혹독한

왜정하 일지라도 변절하지 않고 육으로 영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 그러나 1933년 남궁 선생이 지은

<무궁화 동산>이란 노래가 학생들 사이에 불려지게 되자, 일제는 보안법 혐의로 체포한다. 1936년 옥중에서 병

들어 보석으로 석방된 74세의 남궁 선생은 결국 1939년 소천하였다.

 

 남궁억 기념관으로...  모곡예배당 쪽에서  바라본 기념관

 기념관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남궁억선생 묘역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 일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