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충청도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쫒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불사...

cowboy 2009. 7. 29. 11:02

 남연군 의 묘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이구(李球)의 묘이다.

원래  경기도 연천의 남송정에 있던 무덤을 대원군 이하응 이 지사 정만인 에게 부탁하여 "2대에 걸쳐 왕이 나올자리"라는 풍수지리

설을 믿고  이곳에 있던  가야사(伽倻寺) 라는 절을 불태운후, 1846년 이곳에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장했다.묘를 옮긴후 차남 명복

을 낳았는데, 철종의 후사가 없어 가까운 종손인 명복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고종(高宗) 인것이다. 1866년 독일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묘를 도굴 하였으나 미수에그친 채 돌아갔다. 이사건은 국내외 에서 커다란 비난을 받았고, 대원군은

쇄국과 천주교 탄압을 강화하는 계기가 된것이다.

 

 ▽ 묘지로 올라가기전 에있는(도 지정 문화재기념물 제80호) 표지석

 

▽ 남연군 묘로 올라가는 계단

 

▽  가야사 탑 이 있던 자리에 이장한 남연군 묘

 

▽ 묘지앞 석등에는 "이대천자지지" 라고 새겨져 있다.

그이후 대원군의 아들 고종과, 손자 순종,2대에 걸쳐 왕이 나왔으니,

가히 풍수지리설의 효력을 ...결국엔 이씨 조선의 종말이 오긴 했으나..

 

▽ 경기도 연천에 있던 남연군묘 이장 당시 릴레이 형식으로 전국에서 4대의 상여가 사용 되었다는데

마지막 으로 사용된 상여로서 지금 묘지부근에 보관되어 있으며 이름은 "남은들상여"라 이름지어있다.

 

▽ 남연군묘 바로아래 넓은 가야사가 있던 가야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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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병계

 가야산의 수려한 경관 가야구곡에

이곳을 여행하던 우암 송시열은 바위에 취석(醉石)이란 한자를, 순종 때 판서를 지낸 죽천 김진규는 석문담(石門潭), 와룡담(臥龍潭) 등

을 새겨 암반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판서 김진규는 덕산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중에도 또다시 이곳을 찾아 귀양의 서러움을 달래면서

옥병계(玉屛溪)라고 새겨 놓았을 정도로 가야산 계곡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의 이름을 옥계리라고 부르게 된 것

도 옥병계 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가야교 부근 암벽에는 신라시대 학자인 최치원의 글씨, 조선 중기 학자인 윤봉구

·윤봉오 형제의 글씨 등 다수의 암각문이 새겨져 있으나 아쉽게도 지금은 하천제방 정비 등으로 옛 모습이 온전히 남아있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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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산 스파캐슬

관광 일정의 마지막 코스로 온천체험을 하기위해 덕산 스파캐슬에 들려 시간관계상 사우나만 하고 나와야 했다.

시설이 너무나 잘되어있어 많은 인파가 이곳을 찾고 있었다

 

 

▽ 시간에 쫒기면서도 기어이 옥상에 올라가 스파캐슬의 노천 놀이시설 등을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제공: 이한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