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충청도

가장 아름다운성당, 이명래고약의 발원지-아산 공세리성당

cowboy 2010. 4. 4. 10:00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성당

공세리성당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성당 아산의 공세리 성당에 들르게 되었다.

때마침 성당 보수공사중이라..성당내부는 돌아보지 못한것이 못내 아쉽다.

바로 우리가 방문한 날 공사가 끝나서 다음날부터 공개가 된다는 수녀님의 설명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5번째로 오래된 성당 1890년도에 설립된 120년된 대전교구에선 첫번째로 오래된 성당이

바로 공세리 성당이다. 드라마 "태극기 휘날리며", "에덴에동쪽" 등 각종 영화와 드라마, CF 등 70여편의

배경지이기도 하다. 1801년부터  천주교 박해 100년동안 32분의 순교자가 수원 서울 등에 끌려간 순교

성지이며 순교자 9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곳이다.

 

옛날 국세를 곡식으로 내던시절 (충청도,전라도,경상도) 3개 도의 수곡을 보관하던 공세고 창고지 역할을

하던곳이 었는데 옛날부터 아산만 방조제 삽교천 등 의 공사로 인해 더이상 공세고 창고지 역할을 할수없게

 되며 100년간 폐창된 곳으로 1895년 프랑스 드비즈,(한국명 성일론, 외국명 에밀디비디) 신부님이 공세리

성당에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하게된다.

 

 성일론 신부는 이곳에서만 36년 동안 사시면서 쌀창고를 허물고 복음의 창고인 고딕양식의 근대식 성당인

공세리성당을 건축하게 되면서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가톨릭 신앙 전교의 전진 기지로 바뀌게 된다. 

 

(사진은 순교자 현양비)

 

 성일론 신부는 선교활동을 하면서 두가지 사업으로 커다란 족적을 남기게 되는데, 한가지는 교육사업으로

마을에 학교를 설립해서 마을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또 한가지는 의료사업으로 한방과 양방기술을 익혀

고약을 만들었다..이것이 현대의 이명래 고약이다. 효능은 폭발적인 인기였고 많은 사람들이 고약을 얻기를

원하였으나 성직자 신분상 수익사업인 상행위를 할수 없었던 성일론 신부는 고민을 하게된다.

 

(사진은 좌측건물이 성당박물관,우측건물은 베네딕토관 이다)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당시 꼭 필요했던 고약을 만들어 나눠줄수 있을까.  당시 명동성당 신부님과

성일론 신부님이 친분이 두터워 명동성당 신부님께서 명동성당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이명래 요한 씨

에게 공세리에 내려가서 성일론 신부님을 도와 드리라는 부탁을 하게되고, 그렇게 해서 이명래 요한씨는

공세리 성당에 내려와 성당의 잔일을 도우며 신앙생활을 계속하게 된다..종도치고 마당도 쓸고 나무가지도

자르고,성일론 신부님은 성실한 그를 제자로 삼고 고약 제조비법을 이명래 요한씨에게 전수하게 된다.

 

(아래는 박씨 삼형제의 순교비 이다)

 

이명래 요한씨는 그기술을 가지고 서울의 중림동성당, 지금의 약현성당 근처에 "명래한약방"을 설립하게 되고

 그것이 지금의 이명래 고약이 탄생하게된 유래이다. 그러니 이명래 고약은 원조가 공세리성당의 성일론신부의

고약인 것이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명래 고약은 알지만 공세리성당에서 만들어진 고약인것을 아는이가 드문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란다...이 고약은 처음에는 드비즈 신부의 한국명인 '成一論 고약'으로 불렸었다 ..

 

당시 성일론 신부가 고약을 만들게된 이유는, 이곳 아산만 삽교천 에서는 옛날부터 간척사업을 하여 농토를

만들어 농사를 짓는 농민들이 곡식을 얻게 되면서 삶을 유지하는 노력을 하게 되는데 마을사람들이 계속되는

간척사업에 등창이나고 부스럼이 나자 성일론 신부님이 고약을 만들기 시작하게 된것이란다.. 

 

 (사진은 박물관내부의 전경일부이다. 참고로 박물관은 사진촬영이 금지되어있다)

 

 1895년 당시에는 동네 한가운데 있는 가정집을 성당으로 사용했었으나 1897년 창고 건물을 헐고 구 성당건물

(현 사제관)과 구 사제관 건물(현 회합실, 창고)을 짓게 되었다.

 

 

초대 본당 신부이었던 드비즈 신부는 자신이 직접 성당을 설계하고 지휘 감독하여 1922년 10월 8일 현 성당을

완공하였다. 공세리 본당의 오늘이 있기까지 초대 주임을 지냈던 드비즈 신부의 열정적인 사목 활동이 그 바탕을

이루었다. 드비즈 신부는 2대 기낭 신부가 1년 만에 전임하면서 초대에 이어 다시 3대 주임으로 부임해 1930년

까지 36년간 공세리 본당의 기반을 굳건히 하고 발전의 터를 닦았다. 

 

 크고 화려함으로 건축 당시 아산 지방의 명물로 멀리서까지 많은 구경꾼을 불러왔던 현재의 성당

건물은  그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중국인 건축 기술자들을 불러 지휘 감독하면서 지은 성당이다.

 

 (사진은 성당에 최초로 설치되었던 종으로 박물관1층에 전시되어있다)

 

 

성당을 주위로 십자가의길  14처가 조각되어있다 . 

 

 

 

 

 

특히 이곳은 단풍이 물든 가을에 오면 환상적인 그림이 되는 곳이다.... 

지금은 아직 나무잎이 앙상하지만....그래도 멋지다..

 

 

 

 

 기사자료는 수녀님의 설명을 본인이 아이폰에 녹음해온것을  간추린

것이다. 아이폰 구입후 아주 유용하게 사용한것같다.

 

 

 카톨릭 신자는 아니지만 오늘 공세리 성당을 돌아보니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며 성당역사의 깊은 의미가

서려있는곳 으로 아산 지역을 방문하시는 여행객 들에게 꼭 한번은 가봐야 할 여행지로 권하고 싶다.

 

 

공세리성당

http://gongseri.yesumam.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