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동성당(沓洞聖堂)은 인천광역시의 사적 제287호 문화재이다. 중구 답동에 있는 유서깊은 성당으로 벽돌조 고딕
양식이다.1890년대에 건축된 대한민국의 성당 중 가장 오래된 서양식 근대 건축물 중 하나이다. 프랑스 코스트
(한자명 高宜善) 신부의 설계로 1897년에 처음 건립되었고, 1937년 코스트 신부와 같은 소속인 P. 시잘레(한자명
池士元) 신부의 설계로 증축되었다.
앞면에 설계된 3개의 종탑은 건물의 수직 상승감을 더해주며, 8개의 작은 돌로된 기둥이 8각의 종머리 돔을 떠받들고
있다. 앞면의 출입구는 화강석을 사용하여 벽감 모양의 아치로 하였다. 1979년에는 창문에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하
여 그 위용과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자료참조:다음백과>
19세기말 제물포에 성당이 건립된 것은 이곳이 서울의 관문이고 외국 무역의 거점이 될 수 있는 좋은 입지적 조건
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눈 여겨 본 당시 조선교구장 블랑(1884∼90년 파리외방전교회) 주교의 결정에 의해서였다.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의 체결로 개항지에서의 토지 매입과 성전 건축이 가능해지자 블랑 주교는 국제도시로 부상하고
있던 제물포에 코스트 신부(1842∼1896년)를 파견해 성당 건립을 서두르게 된다. 이후 페낭신학교에 있던 빌렘(홍 요셉 1860∼1938년)신부가 초대 주임신부를 맡아 인천지역 첫번째 본당인 제물포본당(답동본당의 원래 이름)을 설립하게 되는
데, 이때가 1889년 7월 1일이다. 빌렘 신부는 일주일 후 임시 성당으로 마련한 가옥에서 84명(한국인 59명과 일본인 25명)
이 참석한 가운데 감격적인 첫 미사를 봉헌했다.
답동성전의 건립은 빌렘 신부가 이듬해 지금의 성당 자리인 답동 언덕에 대지 3,212평을 매입함으로써 첫 발을 내딛게 된다.
1890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전임된 빌렘 신부에 이어 르 비엘 신부(신바오로 1890~1893)가 2대 신부로 부임해 성당건립
기금을 마련하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수녀를 요청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병으로 인해 휴양을 떠나면서 성전
건립은 1893년에 부임한 마라발(서요셉 1893∼1904년) 신부의 몫으로 넘어갔다.
마라발 신부는 부임하자마자 수녀원 건립을 시작하는 동시에 코스트 신부로부터 성전 설계도를 받아 기초공사를 시작했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잠시 중단되었던 성전 건립은 1895년 정초식을 갖고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간다. 이듬해 종탑이 완공
되고 마침내 1897년 7월 4일 조선교구장 뮈텔(1890∼1933년 재임)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축성식이 거행됐다.
300평 규모로 전면에 3개의 종탑을 갖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전이었다.
1933년 신자수가 1500여명에 육박하게 되자 제 4대 드뇌(전 으제니오1904∼1937년) 신부는 증축계획을 세우고 1935년
부터 성전의 외곽을 벽돌로 쌓아올리는 개축작업을 시작하여 2년 후인 1937년 원 라리보(1933∼1940년 재임) 주교 주례로
성대한 축성식을 가졌다. 웅장하고 화려한 자태로 인천 시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온 답동성당은 문화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1981년 사적 287호로 지정됐다. (자료발췌 답동 성바오로성당 홈피)
어느성당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스테인드 글라스가 참 아름답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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