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제주도

나랏님에게 진상하던 제주애월 의 구엄리 돌염전-소금빌레

cowboy 2010. 6. 10. 20:59

트카로 제주해안을 여행하다보면 애월읍에 구엄마을이 나타난다.

 구엄을 비롯한 중엄과 신엄을 통틀어 속칭 '엄쟁이'라 한다. 이곳에는 소금빌레 라는 돌염전이 있는데.. 

예로부터 소금 곧 '鹽'을 제조하며 살아온 사람들의 마을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만큼 이 마을 사람들에겐 소금을 만드는 일이 생업의 한 수단이었는데

1945년인 해방을 전후하여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구엄 마을 포구 '철무지개' 서쪽 '쇠머리코지'에서부터 중엄 마을과의 경계인 '옷여'까지가 소금밭이었다.

이 일대는 제주도의 다른 해안에 비하여 평평한 암반지대를 이루는데 그 길이는 약 400m이고,

폭은 가장 넓은 곳이 50m이다. 이곳은 북서풍이 셀 때 파도가 쳐올라올 뿐 바닷물에 잠기지 않는다.

 소금밭은 공유수면상에 위치하여 지적도가 있을 수도 없지만, 일정량 개인 소유가 인정 되었으며,

매매도 이루어졌고 육지의 밭에 비하여 값도 더 비쌌다고 한다. 전통적인 밭나눔과 같이 4표(四標)'로 구획하였다.

한 가정에 보통 20∼30평 정도의 소금밭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만들어진 소금은 거의 곡물과 교환하였다.

 "소금 맨들앙 쇠에 실렁 이 마을 저 마을 댕기멍 보리도 바꽝 오곡, 조도 바꽝 오곡 했주. 구엄 땅이 물왓이란

비가 오민 농사도 잘 안 되곡 해부난 소금을 안 만들민 살질 못했주."

 커다란 암반 위에 마치 거북이 등처럼 흙으로 경계선을 만들며 바닷물을 퍼 올려 여러 번의

손을 거쳐 염도를 높였으며 마지막으로 염분을 졸여서 소금을 만들었다.

 

구엄리 소금빌레 에서 생산된 소금은 당시 제주에서 귀하기로 소문나 육지 염전의 열 배  가격으로

거래되었으며, 그 맛과 품질이 뛰어나 나라님에게까지 진상할 정도였다고 한다.

 

제주사람들 대부분은 식수와 생활용수를 해결하기위해 용천수가 있는 해안가에 모여 살며 농사도 짓고

 어로와 해산물을 채취하며 살아 왔다. 그러다 보니 육지에서의 농경지 못지않게 중요한 곳이 바다로서 또 하나의

농경지로 여겼으며 생업의 현장이었다. 그 해안마을의 포구에는 고기잡이 나간 배가 무사히 포구를

찾아 돌아 오도록 불을 밝혀 주는 도대불이 있었다.

 

제주해안에는 용암이 굳은 검은색의 다공질 현무암으로 형성되어 날카롭고 굴곡이 심하고 암초가 많아

배가 드나들기가 어려운 곳이 많은데, 어두운 밤에 귀항하는 고기배들의 안전한 포구길을 안내하던 것이 도대불이다.

현무암을 둥글게 또는 사각진 탑모양으로 쌓아서 만들고 그 꼭대기에 솔칵(송진) 또는 어유(魚油)

 

아니면 석유(石油)로 불을 켠 각지불이나 남포등을 걸어 놓거나, 가져다 놓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등대의 역할을 수행했던 제주의 옛 등대인 셈인데 방파제 끝에 빨간등대와 하얀등대가

세워지면서 그 기능을 다하게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도대불의 시설과 터는 17군데라 한다.

 

그런데 그 도대불 시설과 터가 해안도로 개설과 방파제 축조 등 개발이란 미명아래 파괴 되었고,

다시 재현 되었지만 그 원형을 볼 수 있는 곳이 몇 안 된다 하니 얼마나 아쉬운지 모를 일이다.

 

구엄포구 한쪽에 있는 구엄 도대불고 일제시대에 방사탑 형태로

축조되었다고 전해지는데 4.3사건을 거치면서 허물어진 것을 1968년 재현되어 1974년 까지 사용되다가

 꼭데기의 철탑이 훼손된 채로 방치되다가 최근에 현재의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한다.

 

이곳에는 휴식공간을 만들어 놓고 재미있는 조형물들도 만들어 놓고 있다.

고등어가 물속에서 파닥거리는 조형물도 있고,물고기 지느러미형상의 휴식 간이의자도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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