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충청도

마의태자 슬픈 전설 어린 월악산 자락의 옛 미륵절터

cowboy 2010. 8. 16. 12:42

 하늘재 아래의 미륵리에는 신라 말과 고려 초 사이에 창건했다고 추정되는 옛 절터가 있다.

미륵리 절터가 있는 곳은 신라시대부터 있어왔다는 길인 ‘하늘재’로 오르는 길이다. 절터를 끼고

산등성이로 이어지는 하늘재는 해발 525m의 고갯길로 문경의 ‘새재’가 개척되기 전 까지 경상도와 충청도를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통로였다고 한다.

미륵리 절터는 하늘재로 이르는 오솔길이 평지를 이루는 지점의 오른쪽 숲 속 공터에 흡사 전설처럼 장중한 모습으로 서 있다.

 

절의 입구에 서서 절터를 바라보면 맨 끝에 보이는 우람한 석조 미륵불을 중심으로 석탑, 석등, 돌거북, 건물의 주춧돌 등

여러 흔적들이 검붉은 세월의 이끼를 둘러쓴 채 초연하게 서 있다. 이를테면 전형적인  1탑 1금당 식의 가람배치 양식이다. 이 배치양식은 삼국시대의

가람배치를 대표하는 고식古式이다. 다만 우리나라의 사찰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해 서 있는 것이 보통인데

이 절은 남쪽을 등지고 북쪽을 향해 서 있는 것이 특징이다. 유례를 찾기 어려운 북향北向 사찰인 것이다.

 

 이 절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신라가 망하자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아들과 딸 마의태자 덕주공주는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려고 먼길을 떠났다.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월악산 기슭에 다다른 남매는 각기 덕주사와 미륵사를 세웠다. 덕주사를 창건한 덕주공주

남향(南向)한 바위에 마애불을 새겼고, 미륵사를 세운 마의태자불상을 북쪽으로 두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역사 깊은 곳 치고 아름다운 전설 하나쯤 없는 곳이 드물지만, 허허로운 옛 절터에서 되새겨 보는 두 남매의 전설이 애틋하고 쓸쓸하다.

 

절입구의 당간지주인데  땅에 묻혀 있었던 것이다.겉면에 꽃문양이 있는데 ,
당간지주에 꽃 문양 부조가 있는건 흔치 않은데, 해설사의 말에 따르면 전국에 두곳이 있다고 한다.

 

옛 역자리..공식이름은 대원역원 이다 고려시절 역참이었다고 한다..

 

돌거북은 미완성 작품으로 추정 된다...전체적으로 비례가 맞지않아 미적관점에서도 조금 떨어진다.

만들다 만듯 한것같다는 해설사의 말이다.

주변에 비석이 부서진 조각이 아무리 찾아도 안나온다는게 그 판단의 근거라고 했다.

 

북쪽을 바라보는 이 절터에는 원래 미륵대원(彌勒大院)이라는 석굴사원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목조건물은 13세기 몽고군의 침입으로 모두 소실되었고현재는  석불입상(보물 제96호), 오층석탑(보물 제95호),

삼층석탑(지방문화재 제33호), 석등(지방유형문화재 제19호), 당간지주, 돌거북 등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중원미륵리사는 지난 1977년과 1979년 두 차례에 걸쳐 청주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작업을 통해

일연스님이 거처했던 '미륵대원'으로 밝혀졌다.

 

그 중 석불입상이 눈여겨볼 만하다. 네 개의 커다란 화강석으로 이루어진 이 석불은 높이가 10.6m에 이르는데,

자비로운 미소가 얼굴에 가득해서 바라보는 이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더구나 돌옷으로 뒤덮인 몸통과는 달리, 조성될 당시의 질감과 색깔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상호(相好)가 자못 신비로운 까닭에 예불하려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고 한다.

 

보물 95호 미륵리 5층석탑

 

 

보물96호 미륵리 미륵석불입상

 

 

 

석등사이로 미륵불의 얼굴이 선명하다

 

 

미륵리 3층석탑이다. 미륵리절터에서 약 200여m 하늘재로 올라가는 갈림길 우측전방 30미터 지점

밭둑위에 세워져 있는데,탑을세운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설에 의하면 땅기운이 약한곳에 보강을 위해 세웠다는 설이 있다.

 찾아가는 길

중부내륙고속도로 충주나들목(3번 국도, 문경 방면)→수안보→이화령터널→문경읍(901번 지방도)→

갈평리 삼거리(좌회전)→관음리→하늘재(도보)→중원 미륵리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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