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경상도

고려 충신 포은 정몽주의 충절이 서린 임고서원

cowboy 2011. 5. 11. 07:00

 

작년 여름 경북 영천 여행중에 들렸던 곳인데. 뒤적이다 보니 아직 포스팅 하지않은 사진이 있어 올려본다.

영천은 내가 3년동안  군복무 생활을  한곳이었기에 새삼 감회가 남다른 곳이다. 사실 젊은시절 군생활 할

때는 이런곳이 있었는지도 잘 몰랐었다. 서원이라하면 지금으로치면 사립학교 같은 곳이 아니던가..? 임고

서원에 대해선 아는바가 없었는데 이곳에 들러 이곳 해설사님의 설명과 자료를 보고서야 이곳이 포은 정몽

주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서원 이란걸 알았다. 아래는 임고서원의 입구 2층으로된 영광루 이다.

 

포은 정몽주(1337∼1392)는  누구인가?..

고려 공민왕 9년(1360)에 과거에 급제하여 지금의 국무총리격인 정승 자리에까지 오른 문신이다. 왜구 토벌에 많은

세웠으며, 당시 긴장상태에 있던 명나라에 건너가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기도 했다. 성리학에 뛰어나  동방이학

로 불리며 시와 글, 그림에도 탁월했다. 특히 시조 단심가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다는 그의 충절을 표현한 적인 작품

으로 유명하다. 기울어가는 국운을 걱정하며 고려를 끝까지 지키려 이성계 추대에 반대하다 이방원(조선 태종) 에의해살해

  되었다.

임고서원은 조선 명종 8년(1553) 임고면 고천동 부래산에 세웠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선조 36년(1603)에

다시 중건되었으며,  이때 임금으로부터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인조 21년(1643)에는 여헌 장현광을, 영조 3년(1727)에는 지봉 황보인을 추가로 모셨다. 그 뒤 흥선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철거되었으나 1965년에 정몽주의 위패만을 모시고 복원하였다.

임고서당의 상량문 이라고 깨알처럼 써있는 편액이 서원벽에 걸려있다.

임고서원에는 특히 편액서체가 많이 걸려있었는데...어제..라고 임금과 관련이 있는듯.. 그밖엔  잘 모르겠다...

 

포은선생의 유명한 시조인 단심가 가  편액에 담겨 걸려있다.. 

"이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으랴 "

임고서원의 중건기를 기록해놓은 편액인듯하다..

아래는 임고서원의 중건 상량문을 기록한 편액인것 같다..

 

아래는 임고서원에서 본 영광루이다.

 

아래는 전시각 으로 포은선생의 초상화를 비롯하여  관련 서적이 보관 진열되어 있다.

고려시대 충신 정몽주(1337∼1392)의 초상화로 크기는 가로 98㎝, 세로 169.5㎝이다.

이 초상화는 임고서원(臨皐書院)에 있는 3점의 정몽주 초상화 가운데 하나로 그림의 오른쪽 아래에 ‘숭정기사모본’이라 쓰여

있는 것이다.관리들이 쓰는 모자와 엷은 청색의 관복을 입고 오른쪽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있는 전신상이다. 옷주름 표현은

 청색선을 이용하여 묘사하였으며 돗자리나 배경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이 초상화는 인조 7년(1629)에 김육이 비단 위에 새로 옮겨 그린 것으로, 비단이 많이 헐었으나 옛

그림화풍이 잘 나타나 있으며 3점의 포은 초상화 중 연대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중요한 작품이다

 

한편, 임고서원에는, 소장되어 있는 전적이 약 200여 책이 있는데,명종 8년(1553)에서 조선 후기까지 있다. 이 중에서 지정된

것은 10종 25책이다. 지정된 책을 보면, 『신편음점성리군서구해』·『논어언해』·『심원록』·『임고서원고왕록』·『임고서원

장학계안』등의 책으로 모두가 임고서원에 관련된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임고서원이 창건한 명종 8년(1553)에서 조선 후기까

지의 사정을 알 수 있는 자료로 서원의 운영과 구성 등 서원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임고서원현판

수성제

 

아래는 포은선생의 유허비를 모신 각으로, 유허비란 한 인물의 옛 자취를 밝혀 후세에 알리고자 세우는 비로,

이 비는 포은 선생의 효행을 기리고 있다. 정몽주 선생은 공민왕 5년(1355) 부친상을 당하여 묘 곁에서 3년

을 치르고, 그후 공민왕 14년(1365) 모친상까지 당하여 역시 3년상을 지내였다. 이토록 지극하였던 그의효성

 조정에 보고 되자, 출생지인 이곳 우항리 마을에 비를 세워두도록 하였다.

비는 반듯하고 널찍한 사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운 모습이다. 앞면에는 효행을 행한 마을이라는 뜻의 ‘효자리(孝子里)’

라는 글귀를 세로로 큼직하게 새겼다. 공양왕 원년(1389)에 세운 것으로, 그후 잃어버렸던 것을 조선 성종 18년(1487)

땅속에서 찾아내어 비각을 세워 모시고 있다.

 

(사진출처 다음백과)

임고서원에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한그루 있는데,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서  나이가 5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20m, 둘레는 5.95m에 이른다. 가지는 사방으로 퍼져 있으며, 나무가 자라나는 상태는 비교적 양호

한 편이다. 본래 이 나무는 임고서원이 부래산에 있을 당시 그곳에 심어져 있었던 것이나,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없어진 임고서원을 1600년경 이곳에 다시 지으면서 은행나무도 옮겨 심은 것이라고 한다. 임고서원의 은행나무는

랜 세월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속에 살아온 나무로 생물학적 보존 가치가 인정되어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

다고 한다.

임고서원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4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