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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의 무덤 진시황제릉과 그를 지키는 병마용

cowboy 2011. 12. 5. 06:30

세계 최대의 무덤 진시황제릉과 그를 지키는 병마용

 

 구체구 황룡관광 마지막날 산시성 시안에서 우리는 양귀비와 당현종이 노닐던 화청지와

종루, 진시황제릉 과 병마용을 돌아보았다.... 화청지는 지난편에 소개를 한바있어

오늘은 진시황릉과 병마용을 소개해볼까한다. 화청지를 돌아보고 난뒤,

  버스를 타고 진시황릉에 도착하니.. 노점상들이 능 입구까지 길게 늘어서 있었는데,

 

 

 

주로 파는것이 석류와 옥수수, 사과, 고구마 그리고 기념품 병마용모형 등 이었다..

 

 

특히 황제릉 주변 밭에는 온통 석류나무가 심어져 있었으며 이곳이 석류의 주 산지라고 한다.

 

 

ㅎㅎ하루종일 늘어서서 관광객을 기다린 노점상 들을 생각해서 단체로 석류를 사서

하나씩 맛을 봤다...몸에 좋다하니  먹었지만 뭐 그냥 맛은 그렇다..ㅋㅋ

 

 

 가이드로 부터 입장권을 받아들고 진시황제릉으로  들어가본다.

 

 

들어가니 진시황제릉 이란 글귀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되었다는

유네스코 마크가 새겨진 커다란 돌이 눈에 들어온다..저 멀리로 작은 야산처럼

보이는것이 진시황제릉 이다.

 

진시황제릉 (秦始皇帝陵)은 중국을 통일한 최초의 황제 진시황제의 무덤이다.

13세에 황제에 오른 진시황제는 50세의 이른나이에 사망했는데 역사가 사마천의 기록에

의하면 진시황은 그가 황제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이 능을 만들기 시작하여 36년

 만에 완성 했다고 하는데 그 때는 이미 진시황이 죽은 뒤 였다고 한다.

 

 축조 당시에는 내성과 외성에 둘러싸인 거대한 묘원(墓園)이었으나 현재는

진시황제릉 봉분과 순장묘군(殉葬墓群),과 계속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병마용 갱 만이 남아 있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개인을 위한 묘로서는 최대크기의 능으로, 능의 높이는 약 79m, 동서 475m, 남북 약 384m로,

사람이 다니는 길이 나있으며, 능의 봉분 뒤에는 석류나무가 가득 심어져 있다. 무려 70 여만명의 인부가 동원되었다고

 하는 거대한 무덤 속에는 숲과 산이 있고, 황실 보석창고 그리고 거대한 석각 중국지도가 있다고 한다.

 

능속에는 도굴을 막기 위해서 기궁이라는 자동 발사되는 화살이 설치되어 있다고 전해지기도 하고

또한 혹자는 수은강이 흐르게 하여 도굴을 원천적으로 못하게 하였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무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야산

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1987년 유네스코는 진시황릉을 <세계유산목록>에 넣었지요.

 

 

황제릉은 특별히 볼것은 없는곳 입니다 ..그냥  전기차를 타고 한바퀴 황제릉 근처에까지

다녀오는거 외에는 별로 볼것도 없고 ..ㅋㅋㅋ

 

일행들과 전기차 두대에 나눠타고 약 20여분간을 돌아 오는것이 고작 ㅎㅎ

황제릉은 왜 온건지 ㅋㅋ

 

 

릉을 제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곳이며, 숲이 우거진 불룩한 것이 진시황제릉 입니다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대규모 인력을 동원한 공사였던 만큼 진시황제릉은 중국에서 현존하는 모든

고분 중에서 가장 웅장한 규모라 할 수 있다. 진시황제릉은 능을 중심으로 외성과 내성이 축조되어 있어서,

황제가 생전에 거처하던 궁궐의 모습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진시황제릉의 외성과 내성은 능을 중심으로 남북 방향으로 장방형으로 축조되었으며,

둘레는 각각 6,300m와 2,500m이다. 외성은 동서 약 978m, 남북 약 2,173m, 폭은 6-7m이며, 내성은 동서 578m,

남북 약 684m, 폭은 10m이다. 외성과 내성의 사면에는 성문이 설치되어 있고,

 

성문마다 망루가 세워져 있으며. 외성과 내성 사이에는 동서남북으로 구역이 설치되어

있는데, 창고지가 발굴 조사 결과 동쪽 구역에서는 발견된 것이 없고, 북쪽 지역에서는 부장묘와 편전터, 그리고

관사가 발견되었으며, 또한 서쪽 구역에서는 대형의 순장터와 사원 건물이 모여 있었다고 전한다.

 

이 건물 유적지에서 와당瓦當이 발견되었는데, 길이 48cm, 직경 61cm가 되었다고 하며.

이 와당은 일반 와당보다 4배가 더 길어서 '와당 중의 왕'이라 불린다. 이 능의 건축이 얼마나 웅장했는지를 반증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남쪽에서는 내성 남문에 지표로부터 3m 높이의 망루가 남아 있다고 한다.

 

 

내성은 남과 북, 두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진시황제릉은 내성의 남쪽에, 진시황제의

편전은 이로부터 북쪽으로 150m 떨어진 곳에 있다. 편전은 진시황제릉의 침전 건축 유적지인데, 이곳에는

진시황제 생전의 의관, 탁자 및 일상용품이 설치되어 있으며. 이들 모두는 제사용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진시황제는 자신의 능을 보호하기 위해 외성과 내성으로 둘러싸고, 다시 이 외곽에 홍수에

대비하기 위하여 제방을 쌓았다. 이런 거대한 구조물을 축조한 진시황제는 능 내부에 자신의 관을 안치하고,

각종 부장 물품들을 넣어 놓았다. 지하궁전이라 일컫는 내부는 어떤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한무제에게 궁형을 당한 한대의 사학자, 사마천이 쓴 사기 (진시황본기)에

"진시황은 즉위하자 여산에 능을 축조하기 시작했다. 6국을 병합하여 천하를 통일한 이후,

포로 72만을 징발하여 묘혈을 파고 토대를 다졌다.

 

그 깊이는 삼천三泉이나 되었다". 또한 능 내부에 대해서도, 사마천은

"능묘에는 진시황 생전에 거처했던 함양전 및 아방궁과 같은 궁전을 짓고, 3공·9경 및 문관과 무관의

형상을 돌로 새겨 양쪽으로 세웠으며, 능 안에는 진시황이 좋아했던 진귀한 재료로

 

만든 정교하고 기이한 보물들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서 사방에다 석궁을 설치하라고 명령했다. 그것은 병기의 일종으로

여러 개의 화살이나 돌을 연사하게 만든 제어 장치였다.

 

 

또한 지하궁전에는 황하와 장강, 그리고 진시황제가 동쪽으로 순행할 때 보았던

동해의 물길을 만들어 놓고, 그 물길에 아주 귀한 수은을 부은 후 왕복순환으로 흐르도록 기계장치를 설치해 놓았다.

천장에는 천문 별자리의 모형을 그려 놓았고, 바닥에는 지하궁전의 모형을 그려 놓았다.

 

 

또 인어 기름으로 만든 초로 지하 궁전의 어둠을 밝혀 두었는데,

인어 기름은 연소 시간이 길어 영원히 지하궁전을 밝혀 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라고 적고 있다.

 

능을 조성할 때는 방수처리 및 도굴방지, 그리고 부패방지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깊이가 50m 이상이고, 3층 지하수가 있다면 어떤 공사방법으로 방수처리를 하였을까? 사마천의 기록에 의하면,

“동과 철을 제련해서 물이 새어드는 것을 막았다.”라고 되어 있다.

 

고고학자들은 동과 철 이외에도 문석文石이라는 석재와 단丹과 칠漆이라는 방수 도료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즉 진시황제릉의 지하수 방지는 먼저 동으로 땜질하여 물이 새어 들어오지

못하게 한 후, 다시 문석으로 막고 그 위에 단과 칠을 발라 방수처리를 했다는 것이다.

 

또한 도굴방지를 위해 수은을 대량으로 넣어 놓았다. 수은은 휘발성이 강하고,

독성이 매우 강하다. 그리고 부패방지를 위해 인어(도룡농 혹은 고래) 기름으로 만든 초를 설치해 놓았다.

초가 연소될 때는 대량의 공기가 필요하므로, 초가 연소됨에 따라 지하궁전 내부의 공기는 점차 사라져

비교적 안정된 진공의 상태를 만든다고 한다..

 

 

진시황릉 지하궁전은 현재까지 26m 정도 파 내려갔는데, 이 지점까지도 여전히

인공으로 흙을 다져 만든 황토층이었다 한다. 중국은 진시황제 이전인 전국시대에 이미 지하 50m까지

굴착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하니, 최고의 기술력을 동원하여 만든 능이니만큼

 

그 깊이는 50m 이상일 것이라 추측된다. 이것은 능 깊이가 삼천三泉이라 한 것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삼천은 지하수가 3단계 층으로 되어 있음을 의미하는데, 능 부근의 수문

자료에 의하면 제일 위쪽의 1층 지하수는 지표로부터 16m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2층과 3층 지하수는 아직 확인되고 있지 않다.

 

다시 진시황제의 병마용이 발굴된 곳으로 버스를 타고 이동하여 병마용 갱을 돌아봅니다..

 

 

입구쪽 광장에 병마상이 있는 분수대를 거쳐서....

 

 

병마용 매표소를 통해 안으로 들어갑니다..

 

 

전면으로 저렇게 둥근 하우스처럼 지어진것이 바로 병마용이 발굴된 갱 현장입니다.

 


병마용이란 흙으로 빚어 구운 병사와 말을 가리키는데, 불멸의 생을 꿈꿨던 진시황이 사후에

자신의 무덤을 지키게 하려는 목적으로 어마어마한 규모로 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1974년 중국의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한 병마용은, 그제서야 세상에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현재 까지도 발굴이 계속 진행중인 곳 입니다.

 

 

 

세계 8대 불가사의로 꼽힐 만큼 거대한 규모와 정교함을 갖추고 있고, 700 여개의

실물 크기의 도용 (모두 제각기 다른 자세와 표정, 복장, 헤어스타일을 갖고 있을만큼 섬세함 )과 현재

까지 100 개가 넘는 전차, 40 여 필의 말, 10 만여개의 병기가 발굴 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발굴되는 파괴된 병마용을 뒤쪽의 평지에서

섬세하게 복원하여 원래의 자리에 가져다 놓는 작업이 계속해서 진행중인데

앞으로도 수십년간 발굴과 복원이 필요해보인다...

 

 

 

매스컴에서만 보던 병마용을 직접 현장에와서 눈으로 보니 정말 그규모가 어마어마 하다...

 

 

아래사진중 너울너울한 것이 병마용을 세워놓고 석가래 지붕을 덮은 지하갱 으로 저 속에는 무수히 많은

병마용들이 아직 발굴을 하기전이다.. 

 

 

석가래를 걷어내면 저렇게 전쟁중 불타고 처참하게 부숴진 병마용들이 그안에 들어있다...

아마도 황제릉을 애워싸고 있는 모든 병마용을 발굴 복원하려면 앞으로 도 수십년 이 걸릴지

그이상이 걸릴지도 모른다고 한다.

 

 

현재까지 발굴된 병마용은 1호갱 2호갱 3호갱이며

앞으로 4,5,6호갱들이 계속이어서 발굴될 예정이다...

 

 

 

3호갱을 나와 병마용 입구  우측에 있는  병마용 박물관 을 들어가 봤습니다...

 

 

현재까지 발굴된 모든 도용중에 유일하게 파손되지 않은채로 온전하게

발굴 되었다는 도용 입니다..표정이 참으로 평온해 보입니다..

 

 

활을 잡고 있는 자세의 병사상

 

 

마차를 끌고 있는 병마용

 

 

발굴당시의 모습을 찍은 사진

 

 

진시황제릉 을 찍어놓은  액자

 

 

병마용전차를 재현해 전시해 놓은것이다.

 

 

병마용박물관 로비의 모습이고,

 

 

한편, 중국 정부는  진시황제릉 서쪽 5Km 지점에 진릉지궁(秦陵地宮)을 건축하고

2층에는 진시황제릉 구조를 모형물로 만들어 전시해 놓고 있으며,

지하에는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것을 바탕으로 지하궁전을 재현해 놓고 있다고 하는데

 

황제릉을 다녀오는 바람에 시간이 늦어 진릉지궁은 관람하지 못했다..

저녁에 화청지에서 열리는 그 유명한 장한가를 관람했다.

 

이로써 중국 스촨성 티벳트 장족자치구의 구채구 와 황룡과 산시성의 시안(西安)의

관광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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