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충청도

일제때 도굴 면한 무령왕릉 진묘수가 지켜준걸까?

cowboy 2011. 2. 26. 06:30

 

◎ 무령왕릉 (武寧王陵)

공주여행하면  빼놓을수 없는곳중 한곳이 무령왕릉 이다.

무령왕릉은 1971년 7월5일 송산리 6호고분 배수로 공사중에 우연히 발견되었으며, 묘실전체를 벽돌

로 쌓은 벽돌무덤으로 입구통로에 해당하는 연도와 시신을 안치하는 현실의 두 부분으로 만들어져 있다.

 

무령왕(武寧王,  461년~523년, 재위: 501년~523년)은 백제의 제25대 왕으로 성은 부여(扶餘)이다.

공주 송산리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지석에 따르면 462년 태어났고 이름은 사마(斯麻) 또는

융(隆)이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하다. (일본서기) 에는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왕자의 아들

이고, 동성왕의 이복형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삼국유사) 에는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무령왕릉의 지석

에 따라 삼근왕과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은 것으로 밝혀져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 백제신찬에 따르면

무령왕의 아버지는 개로왕으로 동생 곤지와 부인을 공유했다고 하나 이것또한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이끌어 내려는 시도로 보인다. 그는 어릴 때부터 키가 크고 외모가 수려했으며, 성격이 인자하고 관대

하였다고 한다.

 

501년에 동성왕이 위사좌평인 백가의 계략으로 시해되자 동성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으며, 그의 재위

기간은  23년, 이고, 왕의나이 62세에 죽으며, 그의 아들 성왕이 즉위하였다.  왕은 키가 8척에 얼굴이

그림처럼 잘 생겼다고 전해진다.  혹자는 동성왕의 동생인 혼지(混支)·곤지(昆支)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배다른 형이라고도 전해지기도 한다. 마음이 인자하고 덕이 많아서 백성들이 그를 잘 따랐다고 전해진다.

 

62세에 붕어하여 무령왕릉에 묻혔으며 1971년 음력 7월 공주시의 송산리에서 이 능이 발견되었다. 무령

왕릉에서는 모두 108종류의 2,906점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유물 가운데 입구에서 발견된 왕과 왕후

의 지석을 통해 이 무덤의 주인이 무령왕과 그의 아내임을 알게 되었다. 무령왕릉은 삼국시대 무덤들 가운데

최초로 주인과 매장 연도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무덤이며 이 무덤에서 나온 수많은 부장품은 오늘날 백제의

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무령왕릉및 왕가의 무덤들이 모여있는 송산리 고분군 입구이다.

▲입구를 조금 들어가면 송산리 고분군의 모형관 이 나온다

▲무령왕릉을 제외한 왕가 고분군들의 실내벽화 모습이다.. 

▲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무령왕의 금제 관식,과 뒤꽂이,귀걸이장식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비의 금제 장신도구들, 왕비도 옛날엔 절대권력인 왕의 장식보다 화려할 수 가 없었다고...

 

▲ 고분군 모형관의 무령왕릉의 현실 내부 모형도이다..

▲무령왕릉의  매장당시의  현실을 재현해놓은 모습입니다.

 

왕릉을 수호하기위해 만들어놓은 상상의 동물, 돌짐승상 인 진묘수(鎭墓獸) 국보 제162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기도 아닌것이 비늘이 있고 돼지 같기도 한것이 머리에 뿔도 나고 옆구리엔 날개가 달린 상상속의 짐승석이다..

 

▲ 진묘수 뒷태이다...

▲ 진묘수의 정면 모습

 

 

▲무령왕릉 내부천정과 벽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모형관이다..

무령왕릉 내부벽에는 비록 무덤이지만 내부 벽 곳곳에 창문을 나타내는  中方 이라고 적힌 벽돌을 설치해 놓고 그위로

등잔불을 올려놓는 곳도 설치되어있으며 실제로 발굴당시 그곳에 등잔이 올려져 있었고 등잔에는 기름성분이 검출되었다고

한다.

▲무령왕릉 현실 입구 이다. 

앞의 봉분이 뚜렸한 무덤이 6호 고분군이고 화살표가 있는 커다란 언덕 같은것이 배수로 공사중 발견된 무령왕릉 이다...

일제때 송산리 고분군들 모두가 도굴이 되었으나 무령왕릉은 아마도 언덕으로 알고 무덤인줄 몰랐던 모양이다.

다행이도 발견되지 않아 도굴이 되지않은것이 오늘날  무령왕릉의 많은 유물들을 만날 수 있게 된것이다..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