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강원도

미쳐 피지 못하고 꺾여버린 어린임금의 한이서린 청령포

cowboy 2011. 8. 18. 06:30

 

장릉을 나와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淸怜浦)로 갔습니다.

청령포에 다다르니 뭍에 풀밭에 작은배가 하나 놓여 있네요

 

 

관광객을 위한 배 2 대가  왕복운행을 하고 있습니다.

 

청령포(淸怜浦) 는 영월군 남면 광천리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단종의 유배지로, 2008년 12월국가지정 명승 50호로

지정된 곳입니다.  조선왕조 제 6대 임금인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상왕으로 있다가, 그 다

음해인 1446년 성삼문 등 사육신들의 상왕복위의 움직임이 사전에 누설됨으로써 상왕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이곳

청령포에 유배 됩니다.

 

청령포는 동, 남, 북 삼면이 물로 둘러싸이고 서쪽으로는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있어 나룻배를 이용

하지 않고는 밖으로 출입할 수없는 마치 섬과도 같은 곳입니다. 단종은 이 적막한 곳에서 외부와 두절된 유배생활을

하게되지요, 당시에는 이곳에 거처할 수 있는 집이 있어, 영월호장 엄흥도는 남몰래 밤이면 이곳을찾아 문안을 드렸

다고 전해 옵니다.

 

단종은 1457년 6월 28일부터 두달동안 이곳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그 해 뜻밖의 큰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여 청령포

가 물에 잠기게 되니 단종은 영월 동헌의 객사로 처소를 옮기게 됩니다.  지금 청령포에는 단종 유배시에 세운 금표비

(禁標碑)와 영조때 세운 단묘유지비(端廟遺址碑)가 서있어 옛일을 전하고 있으며, 또한 망향탑, 노산대, 관음송등이 있

습니다.

 수십 년에서 수백 년생의 거송들이 들어 찬 수림지로 단종의 유배처를 중심으로 주위에 울창한 송림을 이루고.
주변에 조성된 크고 오래된 소나무림이 270° 돌아흐르는 서강과 어우러져 자연 경관이 뛰어난  명승지 입니다.

 


단종어소 담장 안에는 단종유지비각이 위치해 있습니다.

 

 이 비는 총 높이 162cm로 밑으로 1단의 화강석 비좌 위에 오석으로 된 비신을 세우고 전면에는

단묘재본부시유지 (端廟在本府時遺址)라 새기고, 측면에는 황명숭정무진기원후삼계미계추읍체

경서 영원영수석 (皇命崇禎戊辰紀元後三癸未季秋泣涕敬書 令原營수石))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단종어소(端宗御所)로 이곳은 조선왕조의 제 6대 임금인 단종대왕의 유배지로 승정원 일기의 기록에 따라

당시의 모습으로 재현한 어소로서 당시 단종이 머물던 본채와 궁녀및 관노들이 기거하던 행랑채가 있으며

밀랍인형으로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곳입니다.

 

2000년 4월에는 단종이 거쳐하던곳에 정면5칸, 측면 2칸반 규모의 겹 처마에 팔짝지붕 형식으로 기와집을

복원 하였고, 명승 제50호로 청령포는 단종의 애절한 사연을 간직한채  많은 관광객이 찾고있는곳 입니다

 

 

 

 

 

2004년 단종어소 복원당시 부속 건물로 정면 5칸,측면1칸반의 규모로 홑

처마에  우진각 지붕형식의 초가집을 건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답니다. 

 

단종어소 입구쪽의 소나무 한그루가  안쪽으로 담장을 넘어 깊숙히 뻗어 있습니다.

 

 

 

 

높이30m의 관음송(觀音松) 소나무는 가슴높의의 줄기둘레가 5m나 되며, 지상1.2m 높이에서 두 가지로 갈라졌고,

갈라진 두 가지의 밑둘레는 각각 3.3m와 3m나 된다. 나무의 나이는 확실치 않으나 단종임금 (1441~1457) 이 유배

 

생활을 할때 이 나무의 갈라진 가지 사이에 앉아서  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어서 약 600년 정도로 추정

하고 있는데, 이 소나무를 관음송이라 부르는것은, 이 나무가 당시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보았다 하여 볼관(觀),

들었다 하여 소리음(音)자를 써서 관음송이라 불려져 전해온 것이라네요.

 

 

청령포 뒷산 층암절벽 위에 있는 탑으로 단종대왕이 유배생활을 할 때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여기저기 흘어져 있는 막돌을 주워 쌓아 올렸다는 탑이라고 하는데...ㅎㅎㅎ 사실유무는 ?

 

서강을 끼고 있는 노산대로 가는 데크계단 입니다.

 

 

 

 

어소에서 북서쪽으로 조금 떨어진곳에 세워진 이비석은 금표비로서, 이 비석에는 (東西三百尺 南北四百九十尺

此後泥生亦在當禁) 동서삼백척 남북사백구십척차후니생역재당금 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청령포에서 동서로는

삼백 척을, 남북으로는 사백 구십 척 안에 일반인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세워진 것이라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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