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지형과 선돌을 둘러본뒤, 일행을 태운 버스는 단종의 능침인 장릉에 도착했다. 개인적으로는 이곳 방문
이 두번째 이다. 첫번째 방문은 모 산악회 회장을 맡고 있던때인 2008년 7월3일 산악회원 40 여명과 선바위산
산행을 마치고 이곳에 들러 관람을 하였던 기억이있어 블로그를 뒤져보니 산행후기가 수록되어 있었다.
장릉은 조선의 6대임금인 단종(端宗 1441~1457)의 능이다. 단종의 이름은 홍위(弘暐)이며 문종의 아들로 세종
23년인 1441년에 태어났으며, 세종 30년인(1448년에 왕세손,그리고 1450년 7월20일에 왕세자에 책봉 되었다.
그후 부왕인 문종이 재위 2년만에 승하하자. 그뒤를 이어 12세의 어린나이로 1452년 5월18일에 경복궁에서 즉
위하였다. 그러나 단종 원년인 1453년 숙부 수양대군이 계유정란을 일으켜 국권을 찬탈함에 단종3년에 상왕으
로 물러나게 되며, 세조2년(1456) 6월 집현전 학사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이 단종 복위사건에 실패하여 참형
을 당하였으며, 다음해 6월21일 단종은 그 사건에 연루 되었다 하여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 으로 강봉된채 영
월 청령포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2개월 남짓 기거 하던중 그해여름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여 물에 잠기자 영월
읍내에 있는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이듬해인 1457년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 유(瑜) 가
단종을 복위하려는 사건이 일어나자 세조는 그해10월24일 어린조카 단종에게 사약(賜藥)을 내리니 그때춘추 17
세의 어린 나이로 승하하였다. 노산군의 시체를 수습하는자는 삼족을 멸한다 는 세조의 엄명이 내려지고 단종의
유해는 동강에 버려졌다. 이때, 영월호장 엄흥도(嚴興道)가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는것은 달게 받겠다" (爲善
被禍吾所甘心) 는 충정으로 단종의 옥체를 몰래 수습하여 동을지산 (冬乙旨山)인 이곳에 몰래 밀장 하였다. 이후
중종 11년 (1516) 노산군의 묘를 찾으라는 왕명이 있었고, 중종36년(1541)에 당시 영월군수 박충원의 현몽에따라
노산묘를 찾았고 수축봉제(修築奉祭)를 하였다. 그후 숙종7년(1681)에 대군으로 추봉되고, 숙종 24년(1698)에 복
위되어 묘호(廟號)를 단종(端宗)으로, 능(陵)을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단종이 승하한지 241년만에 왕실의 정례(正
禮)를 되찾게 된것이다. . 한편 장릉에는 다른왕릉과는 달리 단종에게 충절을 바친 신하들의 위판을 배향한 배식단
사(配食壇祠)와 충신단(忠臣壇), 정려각(旌閭閣)이 있다.
장릉입구에 들어서면 우측으로 단종역사관이 눈에 들어온다.
단종임금에 관련된 역사서적들이 보관되어있고...
2007년에 국가에 청원을 하여 국장을 치루는 발인반차 장면이다.
원래단종의 영정은 곤룡포를 입고 용상에 앉아 있는 형상 이었으나, 200여 년이 흐르는 동안 형태가 훼손되어 불사르고
비슷한 모양을 그려 모셨는데 6·25전쟁 때 훼손되었다고 한다. 그 후 운보 김기창(金基昶) 화백이 충신추익한(秋益漢)이
백마를 탄 단종에게 머루를 진상하는 모습으로 그렸고, 이그림은 영월읍내 단종의 영정을 모시는 영모전에 모셔져 있다.
단종의 영정인 이 그림에 얽힌 설화이다. 그림에는 백마를 탄 단종과 그 앞에 머루 바구니를 들고 있는 추충신
(秋忠臣) 이 그려져 있다. 추충신의 이름은 익한(益漢)으로 한성부윤을 지냈던 사람이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
어 외롭게 지낼때산 머루를 따다가 드리고 자주 문안을 드렸다. 그날도 산 머루를 따가지고 단종에게 바치려고
내려오는 길에 연하리 계사폭포 에서 단종을 만났다. 단종은 곤룡포에 익선관으로 정장을 하고 백마를 타고 유
유히 태백산 쪽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축익한이 단종에게 어디로 가시느냐고 묻자 단종은 태백산으로 간다 하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추익한은 급히 단종의 처소로 와 보니 단종은 이미 변을 당한 뒤였다.
추익한은 다시 단종을 만났던 계사폭포에 까지 와서 단종을 따라 죽었다. 이리하여 추익한도 단종과 함께 태백산
신령이 되었다는...스토리텔링을 김기창 회백이 상상하여 그린 영정이란다...
아래는 능침 가는길 오른쪽에 있는 엄흥도 정여각 (嚴興道 (旌閭閣)이다. 이비각은 엄흥도의 충절을
후세에 알리기 위하여 영조2년(1726)에 세운것이다.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암장하여 훗날 순조
33년(1833)에 공조판서에 추증 되었고, 고종13년(1876) 에 충의공 이란 시호를 받았다.
3년전에는 이런 목책계단이 없었는데..이번에 와보니 이렇게 목책으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충신단 의 천정에 걸려있는 현판..
충신단의 충신들의 명단을적은 위패...
영천 바로 우측으로 장릉의 홍살문 가운데로 약간의 높낮이를 두고 돌로된 길이 제단쪽으로 나있다.
왼쪽의 높은길은 신도(神道)로 신들이 다니는길이며, 오른쪽의 낮은길은 왕들이 다니는 길이다.
신도를 따라 가다보니 영천(靈泉) 이라는 우물이 나온다. 이 영천은 장릉 서쪽에 있는 우물로서 정조15년 (1791) 에
어명으로 영월부사 박기정(朴基正) 이 수축하여 한식때 제정(祭井)으로 사용하였다.
보통때에는 아주 조금씩 샘물이 솟았으나 매년 한식때 제향을 지낼때에는 물이 많이 용출 하였다고 한다.
우물의 깊이는 1.5m 정도이며, 하부는 화강석 돌담으로 둥글게 쌓여있고 상부는 정방형이다.
신도와 왕도의 돌길을 따라가면 왕릉 바로아래 제사를 모시는 사당이다.
이렇게 왕릉쪽으로 문이 나있어 문을 열어놓고 제사를 모신다
왕릉에서 내려다본 사당이다
단종왕릉 전경이다. 능상의 석물들은 추복릉의 전례에 따라 후릉(後凌)의 예를 본받아 행하라는 교지에 의하여
봉분주위에 석호(石虎) 와 석양 (石羊)이 각각 1쌍씩 있으며 봉분 앞에는 상석과 사각옥형(四角屋形)의 장명등
(長明燈)이 있으며 능 양쪽에는 망주석(望株石) 2기와 문인석(文人石) 2기, 석마(石馬) 1쌍이있고, 무인석(武人石)
은 없다. 실록에 따르면 후릉에는 무인석을 설치하지 않는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릉 봉분의 좌우에 세우는 기둥인 망주석에 조각하는 세호는, 처음엔 별다른 형태를 갖지 못하다가 점차
동물의 형상을 갖추게 되었는데, 그 의미와 용도에 관해서는 특별히 정립된 이론은 없으나, 영월 장릉의 망
주석은 조선왕릉중 유일하게 세호가 없다고 한다.
곡장 뒤에서 바라본 장릉의 능침
능침에서 내려다본 장릉전경
칡 줄다리기 행사에 사용되었던 칡넝쿨로 만들어진 줄이 단종역사관 앞쪽에 놓여있다.
칡 넝쿨만으로 엮어서 줄다리기 줄을 만들어 놓고 단종제 등 행사때 사용하는것 같다.
장릉 입구쪽 단종역사관 우측으로 박충원 낙촌비각(朴忠元 駱村碑閣) 이 있다. 이 비각은 박충원의 충신됨을 후세에 널리
알리기 위하여 1973년에 세운것으로, 충신 박충원은 중종 26년(1531) 문과에 급제 하였으며, 사후에 문경공(文景公) 이란
시호를 받았다.
중종 11년(1516) 노산묘를 찾으라는 어명에 의하여 찾아 치제하였으나 그후 방치되었던 묘를 중종36년
(1541) 에 영월군수로 부임한 박충원의 현몽에 의해 봉축하고 전물을 갖추고 제문을 지어 치제 하였다고
하여 그의 충절을 널리 기리기 위해 세운 비각이다.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이 끝내 지키려 했던 한조각 붉은 마음,바로 단종을 향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랬던 이들이 모두 자신의 복위를 꾀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다. 세간에는 국왕
을 지키지 못하고 먼저 간 사육신의 애통함 만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국의 왕으로서 신
하들을 보듬지 못한 단종의 비통함 또한 그에 못지 않았으리라.
약관에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험한 바람에 꺾여버린 꽃망울처럼, 그렇게 단종은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나이 불과 열일곱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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