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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을 촉발시킨 비극의 현장 사라예보 라틴다리 -[발칸여행/보스니아]

cowboy 2012. 12. 12. 07:00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비극의 현장 사라예보 라틴다리-[발칸여행/보스니아]

(여행일 2012-08-28)

 

전날 모스타르 여행을 마치고 사라예보로 와서 헐리우드 호텔에 숙박을 하고 다음날 아침에 사라예보 시내투어를 시작했다. 사라예보1973년 4월 당시 유고슬라비아 세계 탁구 선수권대회에서 이애리사, 정현숙, 박미라선수가 여자 단체전을 석권하여 처음으로 한국탁구가 세계제패를 이룬이라서 색다른 느낌이 드는곳이었다. 

 

제일먼저 밀야츠카강을 가로질러 1798년에 놓여진 라틴다리 찾아갔다. 라틴다리는 밀야츠카강 위에 놓여진 13개의 다리중 하나지만, 이곳에서 제1차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던 오스트리아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암살사건이 일어 유명해진 역사적인 다리이기 때문이다.

 

1914년 6월 28일 오전 10시경, 이곳 사라예보에서 울린 두발의 총성이 지구를 뒤흔들 정도로 대규모 살상전으로 번질줄,.. 당시 19살이었던 세르비아 보스니아계 애국청년 대학생인 저격 당사자 가브릴로 프린치프 는 상상이나 했을까?

 

당시 발칸반도는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이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던 ‘유럽의 화약고’나 마찬가지였다. 독일`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범 게르만민족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범 슬라브민족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특히 세르비아는 1389년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로 줄곧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으며, 1878년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킨 세르비아는 독립을 이루었으나 1908년 또다시 오스트리아에 의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병합 당하게된다.

 

 

민족 독립을 향한 의지를 불태우고 있던 세르비아인들이 남슬라브민족의 통일에 방해가 되는 인물을 없애려는 명분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 바로 사라예보 사건이다. 러일전쟁이 끝난 후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로 이루어진 삼국동맹과

 

영국-프랑스-러시아로 구성된 삼국연합이 한창 대립각을 세우고 있을 무렵인 1914년 6월 28일, 육군 부대훈련을 시찰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가 보스니아의 주도 사라예보를 방문하게 된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군사훈련을 참관하기 위해 사라예보를 방문할 것이라는 소식에 남슬라브민족 통일을 부르짖던 '젊은 보스니아'라는 민족주의 조직에 속한 4명의 학생들이 음모를 해 1차적으로 황태자 부부가 탄 차를 향해 폭탄을 던졌으나 황태자는 폭탄을 주워 테러범에게 도로 던지는 용기를 발휘해 위기를 모면했다.

 

황태자 부부는 이 일로 부상당한 관리를 찾아 문병을 가던 중 운전기사가 라틴다리로 길을 잘못들어 후진하던 틈을 타 세르비아계 보스니아 대학생이던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황태자 부부가 탄 오픈카 앞으로 뛰어 들어 총으로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암살하고 그의 부인 '조피'를 암살했다.

 

당초 가부릴로 프린치프'는 황태자의 부인 조피를 암살할 목적은 없었으며 보스니아 군사령관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장군을 겨냥했었다고 한다.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고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사형 대신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4년뒤인 1918년 봄 폐결핵으로 옥사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분노했다 그리고 가뜩이나 눈엣 가시처럼 여기던 세르비아 당국에 모든 책임을 넘겼으며, 이 사건을 빌미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게 4주후 최후 통첩을 하고 선전포고를 했다.  

여기에 민족주의가 작용, 러시아와 독일, 영국`프랑스까지 개입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으로 확전이 되었으며, 정점을 향해 치닫던 제국주의는 결국 전 인류를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어 버렸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암살된 '라틴다리')

이로써 1차세계대전 4년반 동안 6000만명의 젊은이가 전쟁터에 끌려가 900만명이 사망하고. 세르비아 인구의 23% 희생되었으며, 기관총과 전차, 잠수함이 이때 처음 선보였으며, 독가스가 살포돼 수십만명이 몰살되기도 했다..

 

 

자료화면 (저격직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몸을 숨기고 있던 카페 MORITZ SCHILLE) -펌-

 

 

사건당시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저격 직전 몸을 숨기고 있던 카페가 있던 건물에 현재는 사라예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사라예보 박물관이 들어섰다. 정부에서 이 자리에 있던 카페를 다른 곳으로 이전시켰는데 카페 이름이 '용기있는 자의 집'이라고 한다. 정부가 카페를 수용하면서 높은 보상가를 제시했지만 처음에는 거절했다고 해서 시민들이 붙혀준 이름이란다.

 

 

사라예보 박물관 외벽에는 당시 라틴다리사건을 기록해 놓았으며,  저격 지점에는 ‘지상에 평화’라는 팻말이 있고 모리츠 쉴러 카페박물관으로 개조되어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다.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했던 곳이었음을 표시하고 있는 건 조그만 길 모퉁이 박물관, 널리 알려진 사진들이 붙어있다. 황태자 부부가 타고 있던 자동차, 암살의 순간,끌려가는 세르비아의 청년... 박물관 유리창 안쪽에 당시의 사건 관련 사진들과 설명을 밖에서도 볼 수 있도록 진열해 놓았다.

 

위 왼쪽부터 황태자 부부가 당시 타고있던 오픈카이며 오른쪽으로 '프란츠 페르디난트'황태자와 '조피' 황태자비 아래 우측으로 황태자를 저격한 '가브릴로 프린치프'와 저격직후 체포되는 사진, 재판받는모습 등의 사진이 붙어있다.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를 방문했을 당시 7명의 '흑수단' 암살 단원들이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그중 가장 큰 사진의 주인공이 암살범인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 이다 너무나 앳된모습의 이청년은 보스니아의 영웅이며 우리나라로 치면 안중근 의사 격인 셈이 아닐까?.

 

 

지도에서 보듯 1번과 2번 사이의 빨간표시가 암살되기 전날 1차로 4명의 흑수단원이 거사를 했던 곳으로, 1번과 2번 사이에 오픈카가 지날때 폭탄을 던졌으나 황태자가 재빨리나와 나와 직접 주워서 도로 흑수단원들에게 던져 거사에 실패를 했다고 한다.  저격수 가브릴로의 위치는 5번 이었고 저격당시 코너 카페 안에 숨어있다가 오픈카가 길을 잘못들어 후진하는틈을 타서 거사를 실행했다고 한다 5,7번 사이의 검은 표시가 황태자 부부가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된 장소이다. 

 

위에 총이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거사에 사용했던 총이며 흑수단원들이 거사에 사용했던 폭탄과 같은 종류라고 한다. 저 권총에서 울린 총성 두발로 1차세계대전은 그렇게 발발한 것이다.

 

 

문제는 전쟁의 비극이 여기서 끝난게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20세기 말.그리 오래전 일도 아닌 불과. 수년전 20만 명이 죽고 3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던  보스니아 내전으로. 여전히 시내 곳곳에는 총알자국이 가득하고 사람 사는 마을마다 묘비가 늘어서 있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의 현실이다.

 

 

라틴다리 아래로 밀야츠카강물은 세월을 따라 여전히 흐르고 라틴다리 위에는 20세기초에 일어난 사라예보의 흔적을 찾기위해 이곳을 찾은 관광객과 21세기에 살고있는 사라예보 시민들의 밝은 모습을 볼수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발칸 문제는 수 세기 동안 여전히 이어져오는 진행형으로 '유럽의 화약고' 라는 수식어가 완전히 불식된건 아닌듯 하다는 생각을 하며 라틴다리를 건너 사라예보 구거리 바슈차르시아(Bascarsija)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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